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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변화를 겪는 부동산개발시장(feat. 가격·신뢰의 행방불명)

낭만디벨로퍼 김영철
낭만디벨로퍼 김영철
- 15분 걸림 -
아파트 건설현장(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금은 오래된 용어이지만, 토머스 쿤이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를 1962년 발표할 때만 해도 그가 주창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가히 제목만큼이나 혁신적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익숙한 용어라 용어 정의와 범례를 이 글에서 중언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a) 패러다임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사례와 상황이 반복돼 뚜렷한 추세를 나타낼 때 그 추세를 일반화하면서 등장한다는 것과 b)한번 패러다임으로 굳어지면 그 패러다임을 깨뜨릴 강력한 반례와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오랜 시간 지속된다는 점을 되새기면 좋을 듯합니다.

국내 ​부동산개발 시장에도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선, 지금의 불황과 경색이 오기 이전에 어떤 패러다임 아래 개발사업이 진행돼왔는지 한 번 복기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초자산, 현금흐름, 신용보강이라는 PF의 3요소 중 우리 개발업에서는 신용보강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왔습니다.  ​즉,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없는 한 분양성과 등의 현금흐름과 관계없이 건설사가 정해진 기한 내에 준공을 해야하는 "책임준공 확약"이 거의 모든 PF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약정을 할 수 있고, 또 이행해 낼 수 있는 건설사 수는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책임 준공 확약을 하고, 또 그 확약을 대주가 믿고, 용인할 수 있는(소위 읽어줄 수 있는) 십여개의 건설사를 제외한 나머지 건설사가 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탁사가 책임준공을 확약하는 상품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건설사가 책임준공 확약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신탁사가 책임을 부담하는, 즉 "위험"을 떠안는 대가로 "수수료"를 수취하는, 일종의 신용부도스왑(CDS; Credit Default Swap)에 해당하는 상품입니다. 이것으로 부족하면 사업 주체의 각종 첨담보 또는 관계사의 신용 공여가 덧붙여졌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대주의 PF대출금이 상환될 수 있는 구조"를 목표로 짜여진 시스템이 한국의 부동산 프로젝트금융시장을 관통하는 패러다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한국 부동산 개발 시장의 PF는 진정한 의미의 프로젝트금융이라 할 수 없다는 자조섞인 푸념도 있었죠.

신용보강 외에도 그간의 한국 부동산 개발시장의 패러다임은 몇 가지 하위 특질을 지닙니다. 부동산 개발사업의 기초자산은 토지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PF 성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 자기자본(Equity)을 산정하는 방법으로 토지의 "감정 가격"이 바탕이 됐습니다. 감정 가격은 PF 뿐 아니라, 본 PF의 전 단계인 토지담보대출이나 브릿지론을 일으킬 때도 일종의 기준점이 되는 지표로 활용됐습니다.

부동산 개발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당연히 프로젝트 이익 산정의 탑라인이 되는 매출액인데,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부동산 자산의 가치가 매출액으로 의제됩니다. 즉, a) 우리가 지으려고 하는 자산의 "가치"만큼이 분양가라는 "가격"과 일치하거나 유사한지, b) 그렇게 책정된 가격이 시장에서 거래돼 "분양" 또는 "매각"이 이뤄져, c)결국 예상한 매출액이 실제로 달성될 것인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개발 사업이 성공하거나 또는 착공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개발 사업의 기초자산인 토지 가치 뿐 아니라, 개발 사업의 결과물이 되는 담보물의 가치 산정 또한 감정가격에 크게 의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업타당성 평가 보고서", "준공 후 가치 감정평가서" 등은 PF개발사업의 매출과 이익을 산정하는 데 준거값으로 활용돼 왔습니다.

​이외에도, a) 부동산 가치는 중장기적으로 우상향할 것이라는 시장의 신뢰, b) 그렇기 때문에 "시세"보다 같거나 낮은 가격으로 책정된 분양가로 분양받으면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수분양자의 신뢰, c) 그러한 수분양자가 있기에 분양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행자와 대주의 신뢰 등이 개발시장을 떠받치고 있던 패러다임의 주요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불황이 이어지면서, 기존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나아가 붕괴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우선, 감정 가격에 대한 신뢰가 훼손됐습니다. 이에는 그간의 좋지 않은 관행도 한몫한 듯합니다. 즉, 브릿지론을 받거나 본 PF를 진행할 때, 토지의 감정가를 높여 브릿지론 대출을 원활하게 하거나, 본 PF 자기자본 비율을 높여내던 업계 관행을 모두가 알기에, 감정 가격을 실제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본 PF 타당성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 타당성 검토 보고서나 준공 후 감정평가서에 나온 숫자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의 매매 사례에 비추어 "공격적"으로 책정된 분양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감정 가격은 허수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팽배해진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전통적인 신용보강에 대해서도 불신이 늘고 있습니다.
즉, 신탁사가 책임준공 확약을 한 사업장의 시공사들이 준공을 해 내지 못하기 시작하는 사례가 늘면서, 과연 신탁사들이 현재의 책임준공 확약 현장들, 그리고 미래에 확약할 현장의 책임준공을 담보해 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a) 우선 대주에게, 신탁사가 책임 준공을 확약한 현장이라고 해서 PF 원금의 회수가 확실히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키웠고, b)나아가 신탁사 자체의 의사결정을 움츠러 들게 만들어 책임준공형 신탁 심의 승인률을 낮추고 있습니다.

신용도 수준이 높은 4대 금융지주 계열 신탁사의 책임 준공 확약 정도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대주가 판단하기에 이른 듯합니다.  이는 두 가지 현상을 야기합니다.  a)4대 금융지주 계열 외의 신탁사가 책준 승인을 받았음에도 대주가 모이지 않고, b) 역설적으로 4대 금융지주 계열 신탁사는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책임준공 확약 승인을 내지 않는 모습이 감지 됩니다. 신탁사 책준 상품 자체가 하향 나선(downward spiral)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책준의 종말"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다른 신용보강도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 D건설이 울산 현장에서 브릿지론 후순위 채무를 대위 변제하면서 빠져 나온 사례로 인해, "1군의 신용보강은 과연 믿을 만한가"라는 의심의 싹이 생긴 사례가 있고, 비분양 자산의 매입 확약 또한, 업계 수위의 자산운용사들이 확약을 이행하지 않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매입 확약에 대한 대주의 신뢰도 급감한 상황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현상을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불신'일 것입니다. 가격에 대한 신뢰, 분양에 대한 신뢰,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신뢰, 개발 사업 주체들과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신뢰가 동시에 무너지면서, 실로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으려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동안 시장을 지탱하던 패러다임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격과 신뢰의 상실은 여러 주체를 방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필요하고 합당한 수준 이상으로 개발 사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거품을 끼게 하고 있습니다.

, 감정 가격을 포함한 거의 모든 가격과 지표의 신뢰가 저하되다 보니, 금융사들은 사업의 LTV에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브릿지론이라면 대출금 산정의 모수가 되는 토지 감정가를 믿지 못하게 되다보니, 과거에 비해 LTV 수준을 보수적으로 적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감정평가사들도 현 시장 상황에 따라 위축되어 감정가 자체를 보수적으로 산출하다보니, 대출 실행 금액 산정시 "낮아진 토지 감정가 * 낮아진 LTV"가 적용돼 금융 조달은 더욱 어려워 집니다.

PF 대주 심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금융 기관들이 기본적으로 자산, 입지별로 적용하던 LTV 수준이 낮아졌을 뿐 아니라, 이 마저 심의 테이블에 올라 통과가 이뤄지더라도 LTV 수준이 삭감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1000억원 규모의 PF에서 선순위 700억원, 중순위 200억원, 후순위 100억원 구조로 설계해서 각각의 금융 기관에서 심의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선순위 대주가 심의에서 LTV를 삭감해 버려 550억원 수준으로만 승인이 났다고 하면, 이는 중,후순위를 150억원 이상 더 구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과 같은 경색된 시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LTV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차주에 대한 검증 및 요구사항 또한 과거보다 훨씬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간 "자기자본 20% 룰"이 적용돼 상대적으로 접근이 어려웠던 저축은행 PF의 경우, 이제 20%는 말 그대로 하한선일 뿐 훨씬 두터운 수준의 자기자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투입되는 자기자본의 절대금액과 비율만이 아닙니다. 차주가 제시할 수 있는 첨담보가 있는지, 담보력은 얼마인지, 그리고 분양이 적절히 이뤄지지 않을 경우 차주(시행사)가 버틸 수 있는 추가(extra) 자금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물론 이러한 상황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장은 언제나 순환하기 마련이고, 가격은 반등해 왔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포인트는, 그렇다면 불신의 시기가 끝난 후 어떤 시대가 도래할 것인지입니다.

몇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과거로의 회귀입니다. 즉, 감정평가 가격을 위시한 가격과 지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건설사들과 신탁사의 책임준공 확약 등 신용 보강 장치들에 대한 신뢰 또한 회복되어, 1년여 전까지 잘 작동하던 그 패러다임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현재의 상황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깨뜨릴 정도로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술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소위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가 도래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쪽을 점치고 계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점쟁이가 아닌지라 이런 예측에 능하지 않지만, a) 자기자본이 낮은 시행사업(i.e., 토지계약금 정도만 투입된 시행 사업), b) 자본과 경험이 일천한 차주가 진해한 사업의 리스크를 시장이 충분히 학습하고 교훈을 얻었다면, 이것을 보완하는 새로운 시행 구조가  패러다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자면 서구의 시행사업 구조와 같이, a) 자기자본을 두툼하게 가장 아래를 받치고("Equity"), b) 그 위에 메자닌이 깔리고("Mezzanine"), c) 그 위에는 하나의 트랜치만 투입되는("Senior Debt")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자본이 강화된다는 것과 금융구조 자체가 간결해 진다는 것만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간의 패러다임 핵심은, 특정 주체의 신용 보강에 크게 의존하는 방식, 바꿔 말하면 PF 리스크를 특정 주체에 부담하게 하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구조에서 벗어나 사업 시행자, 재무적 투자자, 대주, 건설사, 신탁사 등 사업 주체가 함께 리스크를 부담하는 구조, 그리고 더 나아가 프로젝트 자체의 기회와 위험을 평가해 투자와 대출을 결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프로젝트 금융(Project Financing)"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가 부동산 개발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평가하는 가늠좌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시행시장의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 왔습니다. 이번 불황이 또 하나의 계기가 돼 보다 진보되고 개선된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지 관심있게 지켜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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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책임준공감정평가

낭만디벨로퍼 김영철

포어모스트자산운용 대표이사. 낭만 디벨로퍼이자 다정한 금융가, 명랑한 스타트업 경영자로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블로그 게시 내용 중 부동산 개발 관련 글을 모아 딜북뉴스 독자분들과 공유합니다. 메신저 서비스인 슬랙(Slack)을 기반으로 부동산 커뮤니티 '레인(Rein)'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메일: eric.youngcheol.kim@gmail.com 커뮤니타: https://join.slack.com/t/reinetwork-hq/shared_invite/zt-285z4g8px-ks6NYuyycyAN14ySN3m0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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