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속 시행과 PF #1. 소규모 시행에서 나타난 변화들
지난 4월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만에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발표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되기까지 5개월 가량 소요됐고, 오매불망 기다린 끝에 마침내 9월초 책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아껴 읽어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허망하게 하루만에 마지막 장을 덮고 말았습니다. 기다림은 길고도 길었건만 즐거움은 잠깐이었습니다.
역시 오랜 시간 기다린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도 무더운 여름날 마침내 개봉했습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심호흡을 한 뒤 영화관에 홀로 입장했습니다. 역시 "세 시간 후"라는 시간은 무심하게 찾아왔고, 달뜬 흥분을 안고는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연극은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다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 긴 기다림을 시작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작으로 선언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우리 모두는 10년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개봉했건만, 극장 입장 후 "두 시간 후"가 두려워, 저는 아직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기쁨과 고통을 인식하는 시간은 더욱 상대적입니다. 대체적으로 기쁨의 시간은 짧게 느껴지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길기만 합니다.
부동산시장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호황도 마침내 막을 내리고, 불황이라는 현실이 도적처럼 찾아 왔습니다. 마치, 대체 언제 호황이 있었던가, 라고 생각될 정도의 차가운 현실입니다. 길었던 호황은 기억조차 나지 않고 현재의 차가운 현실만 눈 앞에 놓인 듯합니다.
불황이 그림자를 드리운지도 어언 1년입니다. 우리 업계 플레이어들의 고통과 관계 없이 시간은 무심하게 잘도 흘러 갔습니다. 그간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프로젝트도 진행되지 않을 것만 같던 "공포"의 시기를 넘어, 물론 여전히 매우 힘들기는 하지만 방법을 모색하고 실제로 실행해 내는 인물들, 프로젝트들이 눈에 띕니다. 물론 시장 자체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만, 그 안에서도 되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바야흐로 "적응"과 "탐색"의 시기인 듯합니다. 조금 더 큰 틀에서 이야기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선 오늘은 작지만 소중한 변화의 물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불황 이후 문 걸어잠근 PF플레이어들
공포의 시기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각종 금융기관 및 시공사 등 시장 참여 플레이어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시장을 관망하는 일일 것입니다.
시행의 규모를 대, 중, 소로 분류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소규모 시행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마을금고의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비 대출"이 무려 다섯 차례에 이은 가이드라인 강화로 사실상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항상 형식과 실질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할텐데, 형식상의 가이드라인 내용 및 숫자보다도, "우리는 당분간 PF를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한 변화였습니다.
많은 상호금융들은 몇 개의 지점들이 하나의 프로젝트에 함께 대출하는 "공동대출"을 원천 금지하거나, 아니면 공동대출 한도 자체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시행 사업에 대한 사업비 대출을 통제했습니다. 하나의 지점에서 취급할 수 있는 금액이 제한적이니 일정 이상의 사업비를 가진 시행 사업에는 당연히 개별 지점들이 공동으로 대출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통제한 것입니다.
소규모 시행에서 많이 활용되던 신협의 시설대 취급도 어려워졌습니다. 당초 신협 시설대는 토지비의 80%와 공사비의 80%를 합한 금액 대출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에 더하여, "토지비의 100%와 총 소요자금의 80% 중 작은 금액"이 새로운 기준으로 추가되면서, 토지비를 상회하는 대출의 취급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몇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대출을 이미 끼고 있는 토지로는 신협 시설대를 이용한 시설대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위 "토지비의 100%와 총 소요자금의 80% 중 작은 금액"을 이야기할 때 토지하자, 즉 기존대출은 제외한 금액으로 산정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토지비가 싼 지방의 경우 시설대를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건축자금이 토지비를 상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 신협 시설대 기준은, a) 상대적으로 토지비가 높으면서, b) 동시에 토지가 대출을 끼고 있지 않거나 그 금액이 매우 적을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활용 가능한 상황입니다.
저축은행 PF도 소규모 시행에 적용하기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알다시피 저축은행 PF는 최소 자기자본 비율이 20%로 문턱이 높습니다. 이 기준 자체는 변하지 않았으나 실질이 바뀌었습니다.
과거 호황 때는 (저축은행마다 관행이 다르기는 했으나) 토지비의 감정가에서 대출금액(하자)을 제외한 금액을 자기자본으로 인정했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토지매매가보다 높은 감정평가금액을 받을 수 있을 경우 해당 차액만큼을 투입한 실 자기자본에 더해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관행이 거의 사라졌으며, 상당히 오래 전에 매입해 장기 보유한 토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오랜 호황을 보내면서, 토지 감정가격을 "들어 올리는" 관행을 모두가 알고 있고, 이제 그 가격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20%라는 자기자본 비율마저도 말 그대로 최소 기준일 뿐, 지방 사업장이거나 차주의 신용이 불안정할 경우 더 두터운 자기자본을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한 저축은행에서 조달 금액 전액을 투입하지 않고, 여러 저축은행이 공동으로 대출하는 관행도 저축은행 PF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조달 총액 100억원 수준의 PF에서도, 대리은행이 되는 저축은행에서 50억원 상당을 승인내고도 나머지 50억원을 모집하지 못해 PF기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도 상당히 많습니다.
PF기표가 이뤄진 프로젝트도 적지않다
이렇듯 어려운 시장 상황이지만, 치열한 고민을 통해 "되는 방법"을 찾아 실제로 기표 및 착공까지 이어져 순항하고 있는 소규모 시행 프로젝트들이 상당수 관찰됩니다.
새마을금고는 전국적으로 3000개가 넘습니다. 이렇듯 수많은 새마을금고 중 자본금이 풍부하여, 한 사람에게 대출할 수 있는 한도("동일인 한도")가 100억원인 새마을금고가 스무 곳 가량됩니다(나머지 새금고들은 동일인 한도가 50억원입니다). 이 새마을금고들의 대출을 활용하면, 100억원까지는 하나의 프로젝트(하나의 법인 또는 개인)에 단일 새마을금고가 100억원까지 대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 대출은 중앙회 가이드라인을 적용받는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비 대출"보다 많은 의미에서 유연합니다. 자기자본 비율의 적용, 필수사업비 확보율, 시공사의 신용 등급 및 시공 능력 등 PF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기준들은 개별 새마을금고마다 별도 가이드라인을 두고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 이 지점이 실용적으로는 더 중요할 듯한데 - 사실 필수사업비와 조달 금액이 100억원을 넘는 프로젝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상기 적시한 바와 같이 검토의 기준이 칼로 선을 긋듯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신탁사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상품을 이용한 프로젝트가 공사비 확보율을 85%까지 요청하는 데 비해, (시공사의 시공 능력이나 재무 상황, 신용도가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기 방법은 70%까지 유연하게 적용되는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또한, 분양대행수수료, 홍보수수료 등의 비용 항목도, 조금 더 큰 사업에서는 "당연히" 사업수지에 반영되고, 필수사업비는 아니더라도 자기자본 비율을 계산하는 모수가 되는 총사업비에는 반영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 방법을 적용할 때는 사업수지에서 배제함으로써 - 물론 실제로는 지급합니다 - 총사업비를 줄이고, 이에 따라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효율화 작업을 통해, 저축은행 PF 사업수지로 작성했을 때 필수사업비와 조달 총액이 150억원에 육박했던 프로젝트의 조달 금액을 100억원 이하로 줄일 수 있었던 사례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의 활용은 아주 큰 리스크가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필수사업비로 산입해야 하는 비용들은 모두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분류가 되어 오고 관행으로 굳어져 온 것들입니다. 즉, 분양이 되지 않을 리스크에 대비해 사업비를 "확보"해 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한 비용들을 기술적으로 확보하지 않는 방향으로 디자인 하게 되면, 분양이 되지 않으면 준공이 되지 않을 리스크에 노출됩니다. 사실상 분양불에 준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즉, 이러한 방법은 분양에 대한 확신을 시행사가 가져야 하며, 그에 대주와 신탁이 동의해야만 실행 가능하며, 동시에 그런 때에만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분양에 대한 확신이라는 주제를 이야기를 하게 되는군요.
분양과 담보대출 전환, 준공 시점 매각의 불확실성이 모두 증대되면서, 점점 더 "뒷문"을 단속하는 것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PF 기표된 딜 중 하나는, 분양을 하는 수익형 부동산이었는데, 분양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주인 시행사가 분양 받고, 몰취 가능한 조건으로 보증금을 납입하는 것이 인출선행조건아었습니다.
사전 청약을 받는 것이 실효가 없는 것을 대주와 신탁사가 모두 알고 있기에 분양에 대한 확신 또는 안전장치에 대한 요구 조건이 점점 터프해 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PF" 영역에서 분양에 대한 장치들이 위와 같이 고도화되고 보강되고 있는 상황인데, 이를 뒤집어 전통적인 PF가 아닌 방법으로 배를 띄우는 프로젝트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토지만 있는 상태에서 a) 인허가를 완료하고 착공 신고와 분양 승인을 마친 후, b) 분양 행위를 시작해서 일정 분양률에 도달했을 때 공사를 시작해 c) 공사비를 지급하면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는 사실상 100% 분양불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분양불 PF가 토지하자를 제거하기 위한 금원 및 PF 기표 최초인출일에 지급해야 하는 비용들 정도는 조달해서 진행되는 것조차 조달하지 않고 진행하게 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만약 토지가 하자를 끼고 있지 않다면, 즉 대출이 없다면, 시행사가 시공사와의 협의만으로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다들 주지하다시피 그런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토지에 하자가 있는 상태에서, 즉 소유권 이전 등기가 되면서 토지 담보대출이나 브릿지론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시행을 진행한다고 상정하면,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해지게 됩니다.
이 때는 토지에 대한 대주와의 대출 약정 내용에 대부분 착공이라는 행위를 담보물의 훼손으로 간주하여 이를 금지하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착공 행위 및 분양 개시에 대해 대주와의 협의 및 합의가 선행되어야 위 방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신탁사와도 협의가 필요합니다. 과거 소위 "굿모닝시티 사태" 이후, 시행사의 자의적인 분양 및 분양 대금에 대한 유용이 문제가 되어, 『건축물의 분양에 관한 법률("건분법")』상 적용 대상이 되는 건축물의 종류와 규모를 정하고, 당해 건축물을 분양하고자 할 경우 적절한 신탁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는 신탁 상품이 "분양관리신탁"입니다. 이에 따라, 건분법 적용 대상 건축물은 분양관리신탁 계약이 체결되어야 분양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건분법 적용 대상이 아닌 개발 프로젝트라면, 기본적으로는 담보신탁에 대리 사무를 더한 구조로 진행하되, 분양불 사업비로 공사 대금을 지급해야 하므로 중도금을 빠른 시기에 열고, 중도금을 기표하는 시점에 담보신탁을 관리형 토지신탁으로 전환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관리형 토지신탁으로 전환하는 것은 중도금 대주들이 통상적으로 요구하는 제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사전에" 협의되어야 합니다. 특히, 담보신탁 상태의 수익권자인 토지담보대출 대주들의 수익권이 관리형 토지신탁의 수익권으로 변경되는 순간 해당 대출이 PF 대출로 간주될텐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 논의되고 검토되고 있는 구조 중 하나는, 분양률이 특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예를 들자면 50~70%에 도달했을 때 "이정도면 사업 진행에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실 착공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호황이 한창이던 몇 년 전에는, 분양에 대한 확신이 있는 현장에 대해, 일반적인 의미의 PF 없이, 토지담보대출 대주의 합의하에, 담보신탁에 대리사무만을 더한 구조로 분양을 시작하기 전에 시공사가 공사를 시작해 준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양에 대한 불확실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시공사의 시공 능력 및 재무 건전성, 시행사와의 상호 신뢰가 매우 탁월하지 않다면 이 구조를 활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담담하게 말씀 드렸지만 각자의 셈법은 매우 복잡할 것입니다. 기존 대주 입장에서는 담보물이 훼손될 수 있는 -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경우 공매 등을 통해 원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드는 위험을 수인해야 합니다. 신탁사 역시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수분양자들의 민원을 감안해야 합니다. 시공사는 처음 선분양 물량으로 인한 분양 대금 유입에도 불구하고 준공에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정도로 분양률이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당 현장의 대출을 정리해야 하는 대주, 사업을 진행해야만 하는 시행사, 공사 수주를 해야만 하는 시공사 등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대안적 구조의 하나로 검토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집요함과 노력의 산물들
위 사례들도 대단한 고민과 노력의 산물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례는, 현 시장에서 저축은행 PF로 진행된 프로젝트들입니다.
얼마 전 확인한 사례에서는, 정말 녹록치 않은 상황 - 20%를 가까스로 맞춘 자기자본, 특별할 것 없는 입지, 현금 유동성이 녹록치 않은 차주 등 - 임에도, 시행사와 금융주관사가 국내에 존재하는 저축은행 전수를 컨택하여 사업이 배를 띄웠습니다.
전수도 한 회사에 한 쪽만 태핑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은행의 한 쪽 프론트에서 드롭하면 다른 프론트 라인을 수소문하는 식이었습니다. 아무리 불황이라도 "절대" 안 되는 딜은 또한 없다는 단순한 진실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진실 - 내가 아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상기 말씀 드린 내용들의 본질은 생각보다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집요함"입니다.
이 불황 속에서 배를 띄운 그 어떤 프로젝트도 "그냥" 된 것은 실로 없었습니다. 우리 업계의 정직하고 실력 있는 시행사와 프로 직업인들이 한 땀 한 땀 성실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여 이루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얼마 전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세상이 이미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가을이 온 지도 몰랐습니다. 시간의 상대성이란 역시 그러한 것 같습니다. 온통 일 생각만 하면서 불황 속을 살아가다보면 우리 삶의 좋은 것들이 오고, 또 가는 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분들, 가을입니다. 힘 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