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 채무인수의 역습
우리나라의 부동산 개발 PF는 상당 부분을 시공사의 신용공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 사업의 PF 관행이 이렇게 발달하고 흘러온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크게는 a) 건설사, 특히 대형 건설사 위주로 시행·건설 업계가 성장해 왔다는 점, b) 시행사 또는 시행사업자가 되는 개인의 재정이 시행 규모에 비해 재정적으로 열위하다는 점, c) 우리나라의 PF 관행이 사업성에 대한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평가보다는 "신용보강"이라 불리는 "누군가"가 제공하는 안전 장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바로 시공사라는 점 등이 대표적인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행사의 신용공여는 그 강도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이자지급보증
책임준공
채무인수
연대보증
이 중 가장 두드러지게 많이 이루어지는 신용보강은 책임준공과 채무인수가 결합된 형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a) 시공사는 책임준공 확약을 하고, b) 그것이 미 이행되었을 경우의 패널티로 채무인수를 하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시공사의 신용공여는 (다른 모든 시행 이해관계자 간의 합의가 그러하듯) 사업 약정서 일체의 곳곳에 반영됩니다. 대표적으로 제반 약정서 중 가장 상위의 지위를 갖는 "사업 및 대출약정서"와 그에 수반되는 "책임준공 확약서", 그리고 시행사가 시공사에게 건설과 관련된 도급을 부여하는 "공사도급 계약서"에 책임준공 및 미 이행시 채무인수에 대한 내용이 반영됩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시공사가 제공하는 책임준공은 매우 터프한 편에 속합니다. 즉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준공을 달성해 내어야만 합니다. (코로나 19가 한창일 때, 코로나 19가 천재지변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강한 논쟁이 있었으며, 이후에는 약정서에 코로나 19를 천재지변에서 제외하는 문구가 삽입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격한 조건인지를 보기 위해 약정서 내에 포함되는 책임준공과 관련된 문구를 옮겨 보겠습니다.
"책임준공"이라 함은 시공사 천재지변, 전쟁 등의 불가항력적인 경우만 제외하고는 차주 및/또는 시공사의 부도사유 발생, 지급불능,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소정의 회생절차, 파산절차 또는 이와 유사한 절차의 개시신청 기타 이와 동일시 할 수 있는 사유, 본건 사업부지 매입의 미완료, 본건 사업부지의 소유권 미확보, 비정상적인 건설 내지 금융환경, 차주, 시공사, 하도급인, 물품 및 자재공급업자, 운송업자 등 제3자에 의한 의무불이행 내지 지체, 공사도급계약의 미체결 또는 무효∙취소∙ 해제∙해지, 건설자재의 부족, 공사대금 미지급 또는 지급지연, 노사분쟁, 인허가 불비 또는 미비, 지연, 무효, 취소, 효력정지, 본건 사업의 분양절차 미개시, 분양률 저조, 설계변경, 차주의 사유로 인한 공사중단, 공사지연, 하자 등 차주로 인하여 발생한 사유, 점유자의 명도지연, 본건 사업과 관련된 시공성 민원 발생, 시공사의 귀책사유 유무, 이 약정에 따른 기한의 이익 상실 여부 등 기 타 여하한 사유로도 공사를 임의로 중단하거나 지연시킬 수 없으며, 최초인출일로부터 [ ]개월이 경과하는 달의 응당일(단, 응당일이 없는 경우에는 해당 월의 말일)까지 관계법령, 설계서 및 시방서와 안전계획 및 품질관리계획에 따라 본건 건물 전체의 공사 완료 및 건축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본건 건물 전체에 대한 정식사용승인(조건부사용승인 및 임시사용승인 제외)을 완료하여야 한다.
어렵게 쓰인 것 같지만, 요약하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돌발상황"에도 불구하고 준공을 달성하여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터프한 조건 내에서 준공을 기한 안에 준공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또는 책임준공의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약정서 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 채무인수 조건이 부가되어 있을 경우에는 여러가지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또한 실제 조문을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시공사는 본 항에서 정한 책임준공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여 대주 또는 대리금융기관이 시공사에게 채무인수 사유가 개시되었음을 통지하는 경우, 시공사는 차주의 대주에 대한 피담보채무를 다음 각 목 기재와 같이 중첩적으로 채무인수하며, 다른 사유로 위 채무인수를 부인하지 아니한다.
가. 시공사는 본 호 기재 채무인수로써 차주의 대주에 대한 피담보채무를 인수 당시 그 상태 및 내용(금융조건을 포함한다)상 동일하게 인수한다.
나. 차주는 본 호 기재 채무인수가 자신에 대한 비면책적 채무인수임을 확인한다. 본호에 따라 채무인수의 효력이 발생하는 경우 시공사는 차주와 함께 피담보채무를 중첩적으로 부담하고, 대주 또는 대리금융기관은 중첩적 채무인수에 따라 차주 또는 시공사에 동시에 또는 순차로 지급기일이 도래한 피담보채무의 전부나 일부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다. 본 호에 따라 채무인수의 효력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담보계약서상의 담보제공자로서의 차주의 의무 및 책임은 소멸되지 아니하며, 담보계약에 따른 대주의 권리, 권한 및 계약상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라. 차주에 대하여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따른 파산, 회생절차 개시, 「기업구조 조정촉진법」 상 부실징후기업 관리절차에 의한 채무재조정 등 여하한 사유가 발생하더라도 본 호에 따른 시공사의 피담보채무 이행금액과 그 의무이행조건은 변경되지 아니한다.
마. 시공사는 본 호 기재 채무인수를 이행하는 경우에도 책임준공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바. 시공사는 본 호 기재 채무인수를 이행하는 경우에 차주에 대하여 구상권을 갖기로 하며, 이를 통하여 채무인수시 발생한 손해를 차주로 하여금 배상하도록 한다. 다만, 대주가 피담보채무를 전액 변제받기 전까지는 차주에 대하여 구상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 시공사는 대주에 대하여 최고∙검색의 항변권 및 분별의 이익을 가지지 아니한다.
아. 대주 및 차주는 이 약정서를 체결함으로써 시공사가 본 호에서 정한 바와 같이 피담보채무를 인수함을 동의 또는 승인하고, 시공사는 본 호 기재 채무인수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내부절차를 완료하여야 한다.
자. 시공사는 피담보채무를 이행함으로써 차주에 대하여 취득하는 구상권, 대위권 기타 일체의 권리(대위에 의한 담보권을 포함)를 이 약정에 따라 차주가 대주에게 부담하는 피담보채무가 전액 변제될 때까지는 대주에 우선하여 행사할 수 없으며, 담보권 실행 시에도 대주의 다음 순서로 변제받기로 한다.
역시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책임준공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채무인수를 피하지 못한다" 입니다.
사실 호황기에는 모든 계약서는 계약서로만 남고, 모든 파트너들이 그 내용을 잊어버리고는 했습니다. 요식행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할인 분양 트리거나 책임 준공 미이행 같은 것들, 그로 인한 채무 인수와 같은 조항들이 발동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문만 열면 완판이었던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황이 불어 닥치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공사비 확보율이 낮은 현장, 그래서 분양이 어느 정도 올라 와야만 준공에 필요한 공사비를 지급 가능한 현장들을 중심으로 미분양으로 인한 준공 지연이 속출했고, 꼭 그 사유가 아니더라도 원자재 상승 및 시공사 자체 재정 악화로 책임 준공이 지켜지지 못하는 현장이 늘어났습니다. 시공사가 도산하는 경우도 역시 많았습니다.
이에 따라 다들 잊고 지냈던 책임준공 및 채무인수 관련 조항들을 들추기 시작했고, 시공사들은 원자재가 인상, 인건비 등 각종 비용 인상, 기성 대금 미수령, 브릿지론 연대보증 및 PF 채무인수 조건의 발동으로 인한 채무 가중 등 온갖 어려운 상황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시공사 입장에서 고통으로만 인식되던 PF 채무인수와 관련하여, 완전히 다른 각도로 전개된 사례를 접했습니다.
해당 현장은 시공사가 책임 준공을 이행하지 못하여 채무불이행 사유가 발생하였고, 마찬가지로 PF 대금의 채무인수 의무가 발생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정도 지점에서 조금 더 정확하게 용어와 프로세스를 정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책임준공 미 이행시 채무인수의 경우, 대부분의 약정 상, 대주가 가지는 풋옵션(put option)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기 공유한 조문에서 시공사의 채무인수가 이루어지는 전제조건을 잘 읽어보면, "a) 본 항에서 정한 책임준공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여 b) 대주 또는 대리금융기관이 시공사에게 채무인수 사유가 개시되었음을 통지하는 경우"라고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책임준공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대주가 채무인수의 개시를 통지하지 않는다면 시공사의 채무인수 의무는 발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접한 프로젝트에서는 a) 책임준공이 달성되지 않으면서 채무인수 "사유"는 발생했으나, b) 대주단이 채무인수 사유 개시를 통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채무인수 의무가 발생하지는 않은 상태였으며, c) PF 만기가 도래하는 시점이 되면 채무인수를 요구할 것임을 구두 통지해 둔 상태였습니다.
이에 시행사는 미분양 담보대출을 조달해 PF 대금을 전액 상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분양 담보대출의 후보 대주들이 시공사의 신용공여(이자지급보증)를 요청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PF 채무인수를 하는 것보다는 미분양 담보대출의 이자지급보증을 하는 것이 시공사에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재무제표에 부채로 계상되는 채무인수보다는 "익스포저"에 불과한 이자지급보증이 합리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공사는 이자지급보증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주단과 직접 소통하여, 채무를 인수하되, 그 방식을 일종의 "셀다운" 형태로 가져오는 것으로 추진했습니다.
여기에 담긴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PF가 진행된 관리형 토지신탁 현장의 경우, 신탁의 우선수익권은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대주가 하나만 있다고 가정)
1순위: 대주
2순위: 시공사
3순위: 시행사
이런 상황에서 채무인수가 발동해 시공사가 채무를 인수하게 되더라도, 신탁에 설정된 우선수익권의 순서에는 전혀 변동이 없습니다. 대주의 채무를 시행사와 더불어 시공사가 중첩적으로 인수할 뿐, PF 원금을 즉시 상환하지 않는 한 대주의 우선수익권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채무인수가 완료되어 시공사가 차주가 된 상황이 되더라도, 시공사가 PF 채무를 그대로 변제 - 쉽게 말해 시공사의 현금으로 PF 원금을 "상환"해 버리게 된다면, PF 채무를 중첩적, 병존적으로 가지고 있던 시행사와 시공사 모두 채무가 사라지게 되며, 이에 따라 신탁의 우선수익권은 다음과 같이 변하게 됩니다. (물론 추후 시공사는 시행사를 대상으로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1순위: 시공사
2순위: 시행사
그럼에도 시행사는 시행사로서의 권리 - 소위 말하는 "사업시행권"은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시공사가 대주의 PF 대금을 그대로 상환하는 것이 아니라, 대주의 채권을 양도 받는 형태로 가져오게 된다면, 기존 대주가 엑시트(Exit) 하게 된다는 것과 채무인수 의무가 면탈된다는 결과는 동일하지만 신탁의 우선수익권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1순위: 대주로서의 시공사(기존 약정에 따른 대주의 권한을 그대로 인수)
2순위: 시공사
3순위: 시행사
이것에 대체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사업 및 대출약정에 따라, 이제 시공사는 본 건 사업의 "대주"의 지위로서 PF 대금이 만기시 상환되지 않을 경우, 차주의 채무불이행에 따르는 여러 권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시행권 포기 통지도 있습니다.
즉, 차주인 시행사가 채무불이행 상태(기한이익 상실)가 되면, 시행권을 포기하게 만들고, 시행사의 우선수익권까지 가져오게 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시공사의 자체 사업이 되는 셈입니다.
1순위: 대주로서의 시공사(기존 약정에 따른 대주의 권한을 그대로 인수)
2순위: 시공사
3순위: 시행사로서의 시공사
물론 이 또한 새로운 대주가 된 시공사의 "옵션"이기 때문에, 무조건 시행사로 하여금 시행권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행사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조를 통해 시공사가 사업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본 건 사례가 껍데기만 남은 사업이라고 한다면 - 즉 시간이 흘러도 미분양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 예상되거나, 뒤늦게 해소 되더라도 시행이익이 없다고 한다면 - 시공사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시점의 문제일 뿐 시행 이익이 언젠가 시행이익이 상당 수준으로 기대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시공사가 현금 여력이 있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구조로 시행권과 시행 이익을 찬탈해 오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례를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점입니다. 시공사의 책임준공 확약 및 미이행시 채무인수라는 구조는, 분명 사업의 안정성과 대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주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일진대, 특수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바로 그 계약에 근거해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본인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 더 나아가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란 참으로 서글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킥오프 미팅, 그리고 사업 약정식 당일에는, 작금의 상황은 이해관계자 모두가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더 서글퍼지는 지점은, 만약 제가 또는 제가 속한 회사가 이러한 상황에 던져졌더라면, 나라면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까지 생각이 이어질 때입니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또한 홀몸이 아니라, 회사와 동료의 입장을 대변해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다소 그렇습니다만 과거에는 더욱더 "계약"이라는 행위가 냉정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과거에 상당한 수준의 신뢰가 있는 파트너사와 계약을 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저는 너스레를 떨면서 상대 회사 대표님께 "우리 사이에 이렇게까지 엄격한 계약서를 써야 될 이유가 있냐"는 취지로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분은 조용히 미소지으면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둘 모두가 각자의 회사에 영구히 소속돼 있다면 아마도 이런 계약이 필요 없겠지요. 그렇지만 계약은 우리 모두가 회사에 없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랍니다."
저는 그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 계약으로 시작된 일은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