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2- PF가 이뤄질 때 일어나는 일들
언어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쉬르는, 그 이전에 뭉뚱그려 인식됐던 언어라는 "기호(記號)"를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로 구분했습니다. 언어의 소리나 발성과 같은 형식을 기표로, 언어가 품고 있는 진짜 의미를 기의로 구분한 것입니다. (주의: 이 때의 기표는 우리가 금융 용어로 쓰는 "기표(起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의 이미지를 떠 올려 보시죠. 귤도 배도 아닌, 푸른색에서 붉은색 사이의 어떤 색깔을 가진 둥근 과일을 우리는 사과라고 부릅니다. 북미 대륙에서도 동일한 과일을 사과로 인식합니다만, 대신 그들은 "사과"라는 기호를 쓰지 않고 "apple"이라고 씁니다. 이 경우 양쪽 나라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과의 이미지와 실상이 기의가 되고, "사과", "apple"이 각각의 기표가 됩니다.
배의 경우는 조금 복잡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배는 황색의 껍질을 가진, 완전한 구에 가까운 과일을 "배"라는 기표로 칭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배"는 조롱박처럼 생긴 어떠한 과일을 칭합니다. 그리고 칭하는 용어도 당연히 한국어 "배"가 아닌, 영어로 "pear"라고 씁니다. 이 경우 표현하는 방식만 배, pear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당 단어가 지칭하는 의미와 실재까지도 차이가 납니다.
프랑스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모두 "파피용"이라고 하는데, 만약 집안에 나비와 나방이 한 마리씩 들어온 상황을 가정해 보면, 프랑스인에게는 파피용 두 마리가 들어온 것이 되고, 우리에게는 나비와 나방이 한 마리씩 들어온 것이 됩니다.
북극 지방의 누나비크어에서는 바다 얼음을 뜻하는 단어가 수십개나 존재한다고 합니다. "밀물에 의해 쌓인 무게 때문에 내려 앉는 얼음", "갈라졌다가 다시 얼어붙은 얼음", "작살로 깨뜨릴 수 있는 강도의 얼음" 등을 뜻하는 단어, 즉 "기표"와 "기의"가 우리 한국어보다 훨씬 세분화 되는 것입니다.
언어가 이렇듯 겉으로 보이는 형식과 내포하는 의미가 구분되고, 장소와 시간, 국가와 문화에 따라 때로는 미묘하게 어떤 때는 크게 달라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업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도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때로 상이한 의미와 범위로 사용되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프로젝트 금융, 즉 PF는 시행 프로세스 전반에서 가장 압축적인 프로세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PF가 되었다", "PF가 일어났다"는 한 마디 말(기표; 記標)이, 단지 "PF 대출금이 집행됐다(기의; 記意)"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PF가 이뤄졌다는 것은, 당연히 가장 본원적으로는 PF 대출이 "실행"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실행"의 의미는 단순히 생각하듯 PF 대출금으로 약정된 금액이 대출을 쓰는 당사자 - 즉, 시행사에게 입금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막대한 돈이 움직이는 만큼 그에 걸맞는 여러가지 안전, 보완 장치들이 겹겹이 덧대어 집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가 통상 어떤 "장치"와 "프로세스"에 의해 이뤄지는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금융과 관련된 일반적인 명제들을 우선 기술해 보겠습니다.
•비단 부동산 개발이 아닌 모든 범주의 "프로젝트 금융(Project Financing)"은 프로젝트(project) 자체의 수익성을 평가하여 실행, 제공되는 금융을 의미합니다.
•프로젝트 자체의 수익성을 평가한다고 함은 프로젝트의 "밖"에 존재하는 다른 요소들 - 예를 들어 금융을 활용하는 사람(차주)의 신용도나 재무 상태, 혹은 그 사람이 제공할 수 있는 담보 등 - 을 부차적 요소로 간주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프로젝트 자체의 수익성과 안정성, 기회와 위험을 면밀히 평가하여, a) 프로젝트 금융의 실행 가능 여부와 b) 프로젝트 금융 실행시 투입할 수 있는 금원의 한도(i.e., 총액 및 LTV), c) 가격(i.e., 금리 및 수수료)이 결정됨을 의미합니다.
•프로젝트의 우량함만을 평가하여 실행되는 금융 기법인만큼, 프로젝트의 밖에 위치한 다른 위험 요인들로부터 프로젝트를 보호해야 합니다. 즉, 외부 위험으로부터의 "절연(絶緣)"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부동산 개발 사업은 특수한 영역이며, 큰 자금이 운용되는 업역입니다. 동시에 부동산 개발과 관련된 여러가지 법제, 관행, 프로세스가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전문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젝트금융에 의해 조달되는 금원을 모든 이해관계자를 대리해서 엄정하게 집행할 자금 관리 대리인이 필요합니다.
위와 같은 일반적인 명제들에도 대한민국에서의 프로젝트금융은 다른 여러 산업과 마찬가지로 한국 특유의 특수성을 여럿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에서의 프로젝트 금융은 프로젝트 본연의 수익성과 위험만을 평가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즉 특정 프로젝트의 우량함만을 독립적으로 평가해 대주단의 참여 여부와 참여 조건들이 결정되기보다는, 프로젝트 자체만으로는 해소되기 어려운 불확실성과 위험이 현실화 될 때를 대비하여 여러가지 안전장치들을 덧대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신용보강"입니다.
우리나라의 프로젝트금융이 요구하는 신용보강은 몇 가지의 줄기로 초점이 모아지게 되었는데, "준공"이라는 가장 큰 리스크를 두고 이를 시공사에게 1차로 전가하는 시공사의 "책임준공 확약"과 이를 2차로 신탁사가 보강하는 "책임준공 확약 보증"의 형태가 가장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소위 "뒷문 단속"을 위한 매입 확약이 덧대지게 됩니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걸어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용보강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현 시장의 관행이 진정한 의미의 "프로젝트 금융"이 아니라는 비판도 많습니다만, 이러한 관행이 정착되어 온 것은 그간 켜켜이 쌓여 온 시행 산업의 좋지 않은 관행 - 토지 계약금 또는 그 이하의 금원만 가지고서도 시행을 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관행이 반영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금융 기관의 탓만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특수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행사가 영세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행사가 영세하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 없다는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서구나 북미에서의 부동산 개발업의 경우, 단일 시행 프로젝트에 30~50% 수준의 두툼한 자기자본이 우선 투여되고, 그 위에 자기자본으로 전환이 가능한 성격의 자금이 깔리고("Mezzanine"), 전통적 방식의 대출금은 단일 트랜치("Senior Loan")로 투입되는 구조가 많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가능한 가장 큰 전제는 두터운 자기자본입니다. 사실 금융기관이 프로젝트의 수익성과 위험을 "독립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제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많은 시행 프로젝트와 같이 너무 적은 수준의 자기자본이 투입될 경우, 프로젝트 금융 검토시 세웠던 가정들이 조금만 빗나가도 PF 원금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대주단 입장에서는 여러 안전장치들을 덧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다음과 같은 의심이 기저에 깔리게 됩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시행사는 어차피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할 것이고, 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수억 정도의 금원만으로 1000억원 이상의 금융을 조달해 시행 사업을 추진해 오던 것을 생각하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 시행사가 투입된 금원만큼을 그냥 손해보고 말지, 라고 판단하는 순간 대주단은 수백, 수천 퍼센트의 "레버리지"의 희생양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행사의 영세성과 그에 따른 적은 자기자본, 그리고 "사고" 발생시 시행사의 위기 극복 능력 및 책임감에 대한 의심은, PF가 일어나는 시점에 실행되는 여러가지 장치에 아주 잘 투영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PF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다소 기이할 정도로 시행사를 최대한 현장(scene)에서 배제하는 듯한 방향성은 이에 기인하는 것이라 판단됩니다. 단순히 위험의 절연을 위한 작업이라고 하기에는, "시행사라는 위험"을 절연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로젝트 금융에 대한 일반 명제들 중 마지막은, 전문적으로 자금과 프로세스를 관리, 집행하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행 사업을 진행할 때 자금과 프로세스 관리 전문가 또는 전문회사가 필요하다는 명제는 말 그대로 "필요"에 대한 일반적인 기술일 뿐, 모든 시행에서 이러한 전문회사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글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체 자금으로 시공사와 도급 계약을 맺고 대금을 자체 지불할 경우, 반드시 제 3의 자금 관리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리츠의 도입과 발 맞추어 제정된 『부동산투자회사법』은 "자산관리회사(Asset Managment Company; AMC)"의 설립 요건으로 자본금 70억원, 전문 인력 5인 이상 등의 요건을 두고 있으나, 이는 동법이 관장하는 "리츠"의 자산을 관리하는 회사의 자격을 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시행 사업에서는 신탁사가 PF 시점부터 이후의 자금 집행 및 프로세스 관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탁사가 이러한 역할을 두드러지게 맡고 있는 데에는, 단순히 신탁사가 시행의 프로세스에 밝고 자금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인재들을 폭넓게 갖추고 있다는 이유 외에도, 상기 언급한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시행의 두 번째 특질인 시행사의 영세함과 그에 따른 결과는, "위험의 절연"이라는 프로젝트 금융 고유의 특질과 결합해 신탁사로 하여금 a) 위험을 절연시키는 비히클로의 역할과 b) 자금 관리와 프로세스 관리 등을 총괄하도록 하는 역할, c) 신용 보강의 주체로서의 역할 등을 원스톱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entitle")하는 형태로 진화한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프로젝트 금융이 일어날 때 많은 경우 신탁사의 "토지신탁" 상품을 활용합니다.
이 상품 - 네, 사실 시행의 "도구"로 토지신탁을 활용하는 것은 "당위"가 아닌 "선택"의 문제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토지신탁은 엄연한 "상품"입니다 - 을 활용하게 되면, PF가 이뤄지는 시점에 다음과 같은 절차적, 법률적 행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1) 토지의 소유권이 신탁사로 완전하게 이전됩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이전이 아닌, 법적 소유권 자체가 이전되어 대내외적인 효력을 가지는 완전한 이전입니다. 즉, 실제로는 소유권이 위탁자인 시행사에게 있고 신탁사는 단지 관리자의 역할만 하거나 하는 은유적이거나 요식적인 행위가 아니며, 신탁사가 가장 중요한 기초자산인 토지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 시행사의 도산 등의 위험으로부터 프로젝트를 절연해 냅니다.
(2) 신탁의 본질과 정의에 따라, 시행사는 위탁자가 되어 토지를 신탁사에 "위탁"하며, 신탁사는 수탁자로서 토지를 "수탁"하게 되는데, 신탁이 토지신탁 계약의 내용에 따라 부동산 개발 사업, 즉 시행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의 "수익자"로, PF시 참여하는 대주단을 위험을 부담하는 층위에 따라 차례로 수익권자로 설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통상 PF 조달을 통해 도급공사비 전액을 확보하지 못하고 일부를 유보하게 되는 시공사가 대주단 다음 순위의 수익권을 설정하게 되며, 시행사는 마지막 순위에 해당하는 수익권을 설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PF 대주단과 시공사가, 본원적인 의미에 따르자면 시행사가 부담해야 할 위험들을 대폭 부담해 PF가 이뤄지는만큼, 이들 이해관계자들이 합당한 원금과 이익을 모두 회수해 갈 때까지 시행사는 단 한 푼의 금원도 가져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위험을 절연합니다.
(3) 신탁사는 신탁 계약에 따라 PF 기표 이후 개발사업의 사업시행자의 지위를 득하게 되며, 이에 따라 이전에 시행사가 체결해 두었던 여러 주요 계약 행위를 양수도 받아 계약의 주체가 됩니다. 이는 가장 중요한 계약 중 하나인 공사도급계약을 포함하며, 이후 건축될, 그리고 건축된 건축물을 분양받는 수분양자와의 계약의 주체 또한 신탁사가 됩니다.
(4) 프로젝트 금융에 따른 대출의 최초 인출일에 일시 인출되는 금원 및 이후 사업 진행에 따라 필요에 의해 한도 인출되는 금원들은 즉시 신탁사가 개설한 계좌로 입금되며, 사업 약정에 따라 대주단과 신탁사의 합의 및 승인 없이는 한 단 한 푼도 시행사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5) 신탁사는 PF 기표, 즉 최초 인출 시점에 일어나는 위 행위 이후, PF 대금의 입출납 및 분양 대금을 역시 "약정"에서 정한 바에 따라 분배, 관리, 집행하는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PF 기표 이후의 시행 프로세스들을 시행사의 파트너이자 대주단의 대리인으로서,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에 따라 직접 챙기며 사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 동행하는 역할을 합니다.
신탁사가 이렇게 사업 구도의 중심에 선 듯 보이고 또 가장 많은 실무적 행위를 담당하게 되기 때문인지 "시행 사업에서 신탁이 가장 중요한 것이냐"라는 질문을 가끔 받기도 합니다. 물론 신탁사는 대한민국의 시행 사업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주체이며, 보다 작은 범주인 PF에서도 필수불가결한 존재이지만, 신탁사가 가장 중요한 주체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탁의 본질 자체가 위탁자와 수익자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탁은 가장 많은 "역할"을 부여 받는 선량한 대리인의 지위를 가진다고 여기는 것이 합리적인 관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법률적, 절차적, 실질적, 형식적 행위들이 "PF가 되었다"고 우리가 짧게 표현하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의 실체는 항상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며, 마치 우리 신체의 껍질을 열어 젖히면 많은 장기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장인의 솜씨로 세심하게 디자인 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벨로퍼로 일하는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