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의 한계와 석유·가스의 귀환

에너지금융업계 전반에 석유·가스(Oil & Gas, 이하 O&G)로의 회귀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재생에너지와의 균형을 모색하는 에너지 전환 논의는 계속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수익과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다시 화석연료로 눈을 돌리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BP 등 오일 메이저의 투자 전략 변경, 미국 정부의 친화석연료 기조, 중동의 에너지 안보 강화 등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ESG나 DEI 기준은 여전히 유럽 등에서 중요한 프레임으로 작동하지만, 글로벌 시장 전체를 지배하기에는 힘이 약해지는 모습이다.
1. ‘미덕’보다 수익을 택한 시장
에너지금융업계는 한때 강조했던 ‘선(善, Virtue)’의 가치를 뒤로 하고, 수익을 좇아 다시 O&G 분야로 향하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과 자문사들은 고객의 니즈에 발맞춰 탐사(Exploration)와 생산(Production) 등 O&G 전 밸류체인에 걸쳐 실질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사실상 O&G에서 완전히 떠난 적이 없다”거나 “그동안은 미드스트림(Midstream)에 집중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채용시장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O&G 경험자를 찾는 헤드헌터의 움직임은 활발하지만, 구직자들은 과거 ‘비인기’ 이력으로 여겨졌던 O&G 경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데 여전히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2. 은행과 자문사의 양극화
모든 금융기관이 일제히 화석연료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트리 허거(Tree Hugger) 은행’이라 불리는 친환경 중심의 금융기관들이 여전히 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부 자문사는 ESG와 지속가능성을 내세우며 O&G 분야를 지양하고 있지만, 실상은 대형 거래를 감당할 여력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대다수 대형 은행과 자문사, 전문 부티크들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O&G, 특히 가스(LNG)와 관련된 거래를 활발히 진행 중이다. 오히려 오일 메이저들은 성과를 적극 홍보하며 비판을 감수하겠다는 태도까지 보이고 있다.
3. 에너지 전환의 변곡점, 그 흔적들
2018년 적도원칙(Equator Principle)에 서명한 은행들이 석탄화력발전에 금융을 제공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후 2019년에는 미국 에너지부가 ‘프리덤 가스(Freedom Gas)’라는 표현을 쓰며 천연가스를 전환 연료로 공식화했다. 2021년 COP26에서는 재생에너지가 자선이 아닌 투자 대상임을 강조했고, 2023년 COP28에서는 여전히 재생에너지가 의제 중심이었지만, 가스가 다시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2024년에는 O&G 투자 규모가 재생에너지를 크게 앞질렀다. 같은 해 O&G 분야에는 약 4481억 달러, 재생에너지에는 약 2470억 달러가 투입되며 현실의 무게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를 보여줬다.
4. BP의 방향 전환, 업계의 시그널
2025년 2월, BP는 연간 100억 달러를 O&G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하며, 재생에너지 투자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영국 테사이드의 500MW급 그린수소 플랜트 프로젝트도 공식 중단됐다. BP만의 변화는 아니다. 에퀴노르는 바렌츠해 요한 카스트베르그 유전 탐사권을 확보했고, BP 트리니다드앤드투바고(Trinidad and Tobago,bpTT)는 진저(Ginger) 가스 프로젝트를 승인하며 대세를 뒷받침했다.
5. 현장의 시각: 지역별, 투자자별 온도차
미국에서는 여전히 “Drill, baby, drill”이라는 표현이 유효하다. 유럽에서는 환경운동가들의 영향력이 잔존하고 있지만, 상류(Upstream) 분야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일부 투자자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높은 수익을 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동에서는 ADNOC, Aramco 등이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장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유럽의 기관투자자들은 ESG와 DEI 준수로 인해 여전히 조심스러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딜로이트 조사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상류 부문의 자본지출은 53% 증가했으며,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도 이러한 흐름에 힘을 싣고 있다.
6. 가스와 재생에너지, 공존의 모색
중동에서는 신규(그린필드) 발전소가 늘고 있다. 재생에너지로는 전체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부 프로젝트에서는 탄소중립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투자 철회 조건을 명시하는 조항까지 도입되고 있다. 런던의 한 인프라 전문가의 말처럼 “어두운 면(Dark Side)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제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진단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의 에너지 정책도 점차 완화 조짐을 보이며, 에너지 안보와 ESG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7. O&G와 에너지 전환, 그 불편한 동행
2003년 에콰도르 OCP 파이프라인에 대한 대출로 WestLB가 환경운동가들의 시위에 직면했던 사건은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이후 약 20년 동안 신재생에너지는 인프라 금융의 주제로 자리잡았지만, O&G의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그 회귀가 더욱 분명해졌다.
O&G와 에너지 전환, ESG 투자는 앞으로도 불편한 공존을 이어갈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업계는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이터는 이미 그 방향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