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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벨로퍼의 학습법

낭만디벨로퍼 김영철
낭만디벨로퍼 김영철
- 14분 걸림 -
사진:픽사베이

사내 주니어급 직원을 교육하기 위해 최근 매뉴얼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포트폴리오를 부동산 외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업무 부하가 과중한 요즘인지라, 시간을 더 빼서 매뉴얼을 만든다는 게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 경험에서 깨달은 점이 있는지라 직접 자료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를 갖춘 회사에는 소위 매뉴얼, 업무 방법서, 교육 자료 등이 있는데, 사실 그 자료를 들춰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업무에 대한 핵심, 축적된 노하우는 온데 간데 없고 변죽을 울리는 껍데기로 가득찬 자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수십년을 이어온 그 회사, 그 집단에는 분명히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문성과 노하우가 실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서면화 되는 순간, 알곡은 타버리고 쭉정이만 남습니다.

이러한 현상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첫째, 특정 사람이 지니고 있는 노하우가 그 사람이 직을 유지하는데 필요충분조건인 경우, 그 노하우를 쉽게 공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첫째의 경우는 단기간에 바로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암묵지를 형식지로 만드려는 경영진의 관점과 관여, 드라이브가 모두 필요한데, 아시다시피 회사란 곳은 워낙 현안이 많은 곳이라 중장기적인 조직 역량 강화를 위한 이러한 작업들은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기 성과가 아닌 중장기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는 경영자가 귀중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흥미롭습니다. 제대로 된 매뉴얼에는 업무 처리 프로세스, 주요 마일스톤, 개별 프로세스를 다룰 때의 유의점, 축적된 노하우 들이 담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하우를 체득하고 있는 것은 주로 시니어, 그것도 소위 "에이스"로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에이스는 바쁩니다.

만약 대기업이라면, 전략기획팀 또는 인재개발팀(HRD; Human Resources Development)에서 주로 이런 직무를 담당하는데, 이들의 주요 업무는 주어진 과업을 쪼개 하부 부서에 하달하고 - 그놈의 탬플릿 -, 각 부서에서 작성해 주는 자료를 취합하는데 불과합니다.

"진짜" 일은 현업 부서의 몫이 됩니다. 그런데 현업 부서는 말 그대로 "현업"을 하느라 바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에이스는 더 바쁩니다. 그러다 보니 매뉴얼 작성 따위의 일은 신입사원 혹은 많이 쳐줘야 대리급의 일이 됩니다.

그리하여 경험과 노하우가 없는 주니어들이 매뉴얼을 작성하는 역설이 탄생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매뉴얼은, 당연한 인과론에 따라 아무도 보지 않는, 볼 필요가 없는 자료로 남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매뉴얼의 역설"입니다.  

매뉴얼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노트북을 여니, 새삼 지난 시간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처음 디벨로퍼 일을 시작했던 2017년 무렵도 생각났고, 부동산 금융을 처음 익히기 시작한 2021년의 시간도 떠올랐습니다.

문득, 이제 막 업계에 입문한 후배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매뉴얼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무 설명도 없이 상황과 일이 주어질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하고 일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그들의 지식과 경험 수준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공감의 순간이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막막함입니다. 저 또한 막막했습니다.

이 막막함이라는 막연한 감정을 파훼하여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막막함이 몇 가지 층위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 우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경우가 제일 막막합니다. 이 때는 보통 다음과 같은 막막함의 나선을 따릅니다.

a)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b) 따라서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모른다.
c) 그래서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른다.
d)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무 사람에게 아무 것이나 묻는다.
e) 아무렇게 답변한 허무한 대답이 돌아온다.
f) 여전히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된다.


여기서 더 최악이 있습니다. f) 상태이지만 무작정 시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g)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지만 일단 토지를 계약한다"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필멸의 길입니다.

(2) 이 루프를 벗어나기 위한 첫 발자국은 a) 단계, 즉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를 서둘러 벗어나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적인 개념과 프로세스를 익히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업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분양"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관리형 토지신탁"과 "차입형 토지신탁"의 차이를 명쾌히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EOD(Event Of Default)"와 "디폴트(Default)"는 차이가 있는 개념인지조차 모르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우선 시행, 부동산 금융과 관련된 주요 개념을 이해하고 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프로세스는 개념의 연쇄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개념이 실행되어 "과업"이 되고, 그 과업이 시간의 흐름 또는 논리적, 인과적 선후 관계에 따라 한 줄로 엮어진 것이 "프로세스"입니다. 역시 시행이 어떤 순서로 이뤄지는지, 더 나아가 시행 프로세스의 각 영역 - e.g., 토지매입, 인허가, PF, 분양 - 을 다시 분절(breakdown)하였을 때 개별 영역 "속"의 세부 프로세스는 어떤 개념과 과업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익혀야 합니다.

이렇듯 개념과 프로세스의 기본을 이해하고 익히는 것이 학습의 첫 발자국입니다.  여기서 착오가 없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i) 학습은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무원 시험이나 공인중개사,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행, PF 등 현실에서 일어나는 진짜 일을 하기 위한 학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론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은 이론보다 언제나 분절적이고 - 즉 스펙트럼이 훨씬 세분화 되어 있으며 -, 현실은 이론에 앞서서 변화합니다. 또한 잘 아시다시피,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으며, 악마는 항상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론을 학습하는 것만으로 현실에서 성공한 디벨로퍼나 부동산 금융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ii) 따라서 이러한 학습의 이유가 a) 모든 개념과 프로세스를 "체화"한 단계까지, b) 더 나아가 실제로 "일을 되게 하는(getting things done) 단계"까지 도달하기 위함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로서의 학습으로는 위 a), b) 단계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체화와 실행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험과 실수, 실패, 그로 인해 축적되는 노하우와 직관, 통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시간을 들여 (바로 써 먹지도 못할 것을) 공부하느냐고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상태"라는, 디벨로퍼와 부동산 금융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선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학습만큼 빠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들여 기본적인 것들을 공부해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학습의 지독한 역설입니다.

(3) 기본적인 개념과 프로세스를 학습으로 접하고 익힐 수 있는 좋은 책 몇 권을 추천합니다. 그 전에 소거법적으로 먼저 접근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i) 교수님들께서 쓴 책을 읽지 마십시오. 교수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교수님들은 디벨로퍼로서의 현업과 현실을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으십니다. 이는 마치 경영대학의 교수님들께서 경영을 해 본 적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ii) "바이블", "마스터"와 같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는 책을 가급적 피하십시오. 저도 여러번  샀고,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사고 있는데, 책장에 꽂힌 채로 먼지만 쌓여 가고 있습니다.

이런 책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책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책들은 개념(concept)을 개괄(summary)해 준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디벨로퍼로서, 또는 부동산 금융인으로서 일을 해 나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개념을 개괄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a) 개념의 말단까지 파고 들어가 b)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여, c) 어떻게 일과 실행으로 연결되는지를 알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행히도, 개념에서 출발하여 실행과 사례까지 연결되는 몇 권의 보석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저 또한 이 책들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i) 박국규, <부동산 개발사업의 사업성검토와 시행>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 중 거의 유일하게 시행의 A~Z를 프로세스에 따라 개괄한 책입니다. 그것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 또는 박사과정 학생이 디벨로퍼를 인터뷰해서 쓴 듯한 어설픈 내용이 아니라, 실제로 시행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 본 분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난제들과 그것을 돌파했던 경험까지 녹아 들어가 있는 명저입니다.

주택 사업, 그 안에서도 분양 사업에 국한돼 있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유형이 시행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사업 형태인만큼 초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ii) 법무법인 지평, <부동산 PF 개발사업법>

우리나라의 대형 로펌 중 하나인 법무법인 지평의 건설부동산팀 변호사들이 집필한 책입니다. 제목에 "법"이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지만, 법률 서적의 탈을 쓴 부동산 개발 사업(시행)의 개념과 구조, 프로세스의 총서 같은 책입니다. 특히 개발 사업의 기본 구조, 주요 플레이어, PF 유형, 주요 신용보강, 부동산 개발 관련 신탁, 채무불이행 등 주요 개념들이 총 망라돼 있는 명저입니다.  

무엇보다,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쉽게" 쓰여 있습니다.

iii) 박성식, <공간의 가치>

저자인 박성식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서울대 건축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정통 건축학을 공부한 건축가이면서,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도시기획자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더해 감정평가사 자격을 득했으며, 글로벌 종합 부동산 회사에서 근무하신 경력도 있고, 본인의 저서와 동일한 이름의 프롭테크 기업을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부동산 산업 내에 활용되는 여러 학문을 폭넓게 공부한데다, 풍부한 현업에서의 경험까지 갖춘 분이 쓴 저작답게, 개념에서 출발하여 현실 세계 말단의 수분양자가 접하는 세계까지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는지에 대해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책은 "짓고 파는" 것에 국한해 설명하는 여러 책들과는 달리 부동산의 본질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점이 특장점입니다.

이 책들을 다 읽고,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또는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위한 공부가 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저에게 메일을 보내주면 추가로 몇 권을 추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런데, 지금까지 저에게 부동산 개발 관련 도서 추천을 부탁한 꽤 많은 분들에게 이 책들을 권해 드리면서 동일한 말씀을 드렸지만, 슬프게도 아직 후속 도서 추천을 요청해 준 분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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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디벨로퍼

낭만디벨로퍼 김영철

포어모스트자산운용 대표이사. 낭만 디벨로퍼이자 다정한 금융가, 명랑한 스타트업 경영자로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블로그 게시 내용 중 부동산 개발 관련 글을 모아 딜북뉴스 독자분들과 공유합니다. 메신저 서비스인 슬랙(Slack)을 기반으로 부동산 커뮤니티 '레인(Rein)'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메일: eric.youngcheol.kim@gmail.com 커뮤니타: https://join.slack.com/t/reinetwork-hq/shared_invite/zt-285z4g8px-ks6NYuyycyAN14ySN3m0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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